장일원 수필가 서재

柳岸
수필
1948. 8. 9.
광주시 남구 봉선동
































 그때 그대로
HIT : 52 WRITER : 장일원 DATE : 18년01월01일 18시37분
ㆍ출처(Link) : http://blog.naver.com/c1wons/30132732374
| |

그때 그대로

 

 

 

 뒤안에 장광이 있다. 장광 뒤 언덕 위로 대밭이다.

햇볕 따스한 봄날, 아버지를 따라 장광 옆 언덕을 올라 대밭 속으로 들어갔다. 겨우내 회색으로 변한 댓잎이 대끌텅을 덮을 만큼 두껍게 깔렸다. 댓잎 사이에 반짝반짝 움직이는 게 있다. 뭔지 모른 채 발을 옮겨 더 안으로 들어간다. 대밭 가득히 마른 댓잎색깔의 수많은 기다란 것들이 뒤엉켜 꿈틀거리고 있다. 발아래를 보니 발밑에도 지나고 있다.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선다는 게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넘어지면서 짚은 곳은 한 무더기가 뒤엉켜서 꿈틀거리고 있는 바로 옆이다. 손을 짚자마자 한 마리가 손등을 넘어간다. 소스라치게 놀라 팔을 접으며 뒤에 서 있는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의 표정이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모든 걸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긴 겨울밤, 고구마는 식구들의 유일한 간식거리다. 아버지는 고구마 껍질을 칼로 깎지 못하게 하고 숟가락으로 긁게 한다. 칼을 대면 두껍게 깎여서 고구마를 허비한다는 것이다. 그날 밤에도 식구들이 고구마를 먹고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나는 아버지에게 결연히 말했다.  

“나, 집 나갈 거야.”

“그래. 나갈 테면 나가라.” 

아버지는 내 선언에 단호하게 말했다. 옷가지를 주섬주섬 안고 방을 나와 마루에 섰다. 마루에서 내려다본 캄캄한 대문간은 두려움이다. 신발을 신고 마당을 지나 대문 밖으로 나간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는다. 집을 나가겠다고 방을 나온 게 후회된다. 밖에서 방안 식구들 말을 들어보니 벌써 나를 잊은 듯 딴소리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면 멋쩍은 일이다. 그러나 밖이 너무 춥다. 그래도 한참 동안 견디다가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왔다. 다시 들어온 나를 누구 한 사람 아는 채도 않는다. 

‘집 나간다더니, 무서워서 못 나가겠더냐?’ 

이런 놀리는 말은커녕, 당연히 들어 올 거라 예상해서일까. 아니면 그렇게 말을 걸면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아서일까.  

‘방을 나설 때 정말로 집을 나가려 했는데-’ 

비장한 결심을 알아주지 않는 아버지가 서운하다. 그리고 마음과 다르게 말과 행동을 일치시킬 수 없는 첫 경험이다.

 

 

 형이 토끼 눈처럼 빨간색이 가운데 들어 있는 구슬을 가져왔다. 아버지가 지켜보는 가운데 방에서 형과 구슬치기를 한다. 형은 내 구슬을 매번 못 맞힌다. 형이 못 맞히는 이유는 울퉁불퉁한 죽석竹席방 바닥 위에서 내

것을 직선으로 맞히고자 해서다. 나는 대자리의 골을 따라 굴러가게 하여

맞힌다. 그렇다고 매번 맞히는 게 아니다. 힘을 더 주어 굴리면 골을 벗어나 버린다. 형은 처음 하던 대로 직선으로 구슬을 굴리고, 나는 처음 하던 대로 골을 따라 굴린다. 조금도 변함이 없는 단조로운 우리 형제의 구슬치기는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남으로써 끝났다. 단순한 구슬치기인데도 다른 방법을 시도하지 않고 안정된 방법만 고집하는 내가 답답해서였을까.

 

 

 겨울밤 뒷문 쪽의 대밭에서 내려오는 외풍을 막는 것은 병풍이다. 계곡 속 꽃사슴과 연꽃 아래 원앙 한 쌍이 떠 있는 병풍은 째깐 누님과 나만의 이야기 숲이다. 소나무 계곡과 연꽃 사이로 들락거리는 이야기는 그날 저녁에도 그칠 줄 모르고 이어졌다. 누워 있는 아버지를 살피면서 부엌에 있는 큰 누님에게 무언가 다급하게 말하는 어머니를 가끔 보면서 우리 둘은 병풍 속 원앙이 노는 연못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나를 서너 번 부르는 것 같다. 곧 얼마 뒤 놀란 어머니의 울음소리에 바라보니 어머니가 아버지를 흔들고 있다. 황급히 사랑채에 있는 형을 부르며 바깥으로 나간 어머니는 왼손을 붙잡고 다시 들어와 아버지 입에 검붉은 손가락을 넣는다. 

 

 아버지 죽음 앞에서 우리 가족은 어머니의 단지斷指 외에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 벌써 누군가 사다리를 올라가 사랑채 지붕 위에 하얀 옷을 펼치고 있다. 그날 이후 병풍이 꽃사슴과 원앙에서 커다란 붓글씨로 바뀌고 나서는 더 이상 째깐 누님과 나만의 이야기 숲이 되지 않았다.

 

 삶이란 조각으로 이루어진 기억의 배지培地에 하나씩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걸까?  지금 나는, 여섯 살 기억에서 육십여 년을 더 지나왔다.

어쩌다 등산길에서 만나는 마른 댓잎색깔의 무자수는 지금도 지늘킨다. 그리고 마음과 다르게 말과 행동을 일치 시킬 수 없는 경우는 지금도 있다. 일은 도전의 즐거움에 있지 않고 안전한 성공 여부에만 있다. 그리고

생사의 문제에 있어서 아무런 방안이 없다.

나는 여전히 여섯 살, 그때 그대로다. <><

 

| |
  [주의]깨끗한 인터넷문화 조성을 위해 타인을 비방하거나 광고성 글은 삼가해주세요. (정보통신망법[제50조의7])


이  름
비밀번호
 상하이 샤오니
 벌초